아들은 환호했고 아버지는 눈을 감았다
[박동희의 베이스볼포엠] 아들은 환호했고 아버지는 눈을 감았다
![]() KIA 포수 이성우가 다시 환호할 때 그의 부친은 아들의 가슴에서 부활할 것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어제 새벽, 장례식장을 향했다. KIA 포수 이성우 부친의 작고 소식을 들은 것이다.
얼마쯤 갔을까. 무심코 차창을 열었다. 뜨거운 바람이 담벼락 끝에 돋은 병 조각처럼 얼굴에 박혔다. 사흘 전 꼭 이런 바람이 광주구장에 불었다. 그때 이성우가 다짐한 말은 이랬다.
“꼭 안타 칠 테니까 지켜보세요.”
6월 17일 이성우는 오랜만에 1군에 올랐다. 선발출전한 19일 사직 롯데전에서 4타수 1안타를 기록했다. 상승세를 타나 했다. 그러나 이후 4경기에서 안타를 치지 못했다. 투수 리드와 송구, 블로킹 등 수비수로서의 포수는 최상이나 타자로서의 포수는 늘 기대치를 밑돌던 이성우였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닌 듯했다.
27일 광주 히어로즈전에 앞서 <스포츠춘추>는 이성우에게 “깨끗한 안타로 어렵게 잡은 기회를 놓치지 마라”는 덕담을 했다. 바로 그때 이성우가 한 말이 “꼭 안타를 칠 테니까 지켜보세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성우의 안타를 보지 못했다. 열차 시간 때문이었다. 관전을 중도에 포기했다. 하지만, 이성우의 그 말이 오랫동안 귓가에 맴돌았다. 장례식장에 간 건 부친을 잃은 이성우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기 위해서였다. 덧붙여.
“안타 축하한다.”
상주인 이성우와 인사를 나누고 가장 먼저 건넨 말은 그랬다. 이성우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히어로즈전에서 이성우는 9회 말 2사 7번 타자 최경환의 타석 때 대타로 출전했다. 그리고 히어로즈 투수 전승윤의 공을 받아쳐 중견수 앞 안타를 기록했다. 2대 10으로 팀이 크게 뒤지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성우는 개의치 않았다. 1루에서 잠자코 서 있었지만 속으론 만루홈런이라도 친 것보다 더 기뻐했다. 경기가 끝나고 이성우는 최태원 주루코치에게 펄쩍 뛰면서 이렇게 자랑했단다.
“코치님, 저 안타 치는 거 보셨어요”라고.
이성우의 안내를 받아 조문객 접대용 식당에 갔다. 최 코치가 자릴 잡고 앉아 있었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KTX를 타고 왔다고 했다. 현역시절에도 최 코치는 다른 이의 아픔을 가장 먼저 슬퍼했던 이였다.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갑자기….”
이성우의 부친은 간암 말기 환자였다. 지난 4월에야 병을 알았단다. 손 써볼 틈도 없이 암은 번졌다. 의사는 시한부 3개월을 통보했다. 가족은 망연자실했다. 막내인 이성우는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프로에 확실하게 성공한 아들을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려면 조금 더 기다리셔야 했는데…” 이성우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2000년 이성우는 성남서고를 졸업했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렇다고 초고교급 유망주도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해 LG에 입단했다. 팬 북에 그의 이름은 없었다. 연봉 1천3백만 원의 신고선수였던 탓이다.
열심히 하면 정식선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1년을 견뎠다. 그러나 그에게 찾아온 건 방출 통지서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당시 LG 2군 감독이던 김성근 현 SK 감독에게 매달렸다.
이성우의 노력을 높이 산 김 감독이 구단을 설득해 2년 더 LG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다. 신분은 여전히 신고선수였다. 2002년 상무에 입대한 이성우는 2004년 제대와 함께 LG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야신’ 보다 ‘지푸라기’가 되길 원하던 노(老) 감독은 팀을 한국시리즈 준우승으로 이끌고도 해임된 지 오래였다.
이성우는 무작정 SK로 찾아갔다. 테스트를 받았다. 블로킹, 송구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시 신고선수로 입단했다. SK 사령탑이던 조범현(현 KIA) 감독도 그의 능력을 높이 샀다. 2006년 7월에는 정식선수까지 됐다. 하지만, 1군 출전 기회는 오지 않았다. 박경완, 정상호는 이성우에겐 벽이 아니라 거대한 산이었다.
다른 선수에겐 호흡처럼 빈번한 1군 출전이 그에겐 꿈이었다. 그 꿈을 이룬 건 2008년이었다. 지난해 5월 이성우는 전병두, 김연훈의 트레이드 상대로 김형철, 채종범과 함께 KIA로 트레이드됐다.
많은 KIA 팬이 전병두의 트레이드를 반대했던 터라, 이성우는 환영받지 못한 손님으로 광주땅을 밟았다. 미운 오리도 그런 미운 오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왜냐? 프로 밥을 먹은 지 9년 만에 1군 경기에 출전할 기회를 잡았기 때문이다.
![]() 지난해 7월 4일 대구 삼성전에서 9회말 2사까지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던 이범석이 박석민에게 내야안타를 허용하고 낙담하자 이성우가 등을 두들기며 위로하고 있다. 지금은 이성우가 위로받을 차례다(사진=KIA) |
2008년 5월 7일 광주 삼성전에서 이성우는 꿈을 이뤘다. 1군 경기에 출전한 것이다. 타석에 서진 못했으나 투수 리드와 송구가 돋보였다. 그리고 이틀 뒤 경기에선 타석에 들어서는 영광을 누렸다.
2008시즌이 종료했을 때 이성우는 주전포수 김상훈의 부상 공백을 차일목과 잘 메웠다는 평을 들었다. 스프링캠프에서도 열심히 했다. 올 시즌 차일목을 제치고 1군에서 시즌을 맞이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안타를 친 기쁨도 잠시였어요. 경기 끝나고 2군행을 통보받았어요.” 이성우가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최 코치에게 자신의 안타를 자랑했던 이성우는 몇 분 뒤 코칭스태프로부터 2군행을 통보받았다. 얼굴이 개나리처럼 노래졌다. 하지만, 어쩌랴. 이것이 야구인 것을.
이성우가 숨을 크게 내쉬고 나서 휴대전화를 들었다. 가족에게 알려야 했다. 병상의 아버지가 혹시라도 TV를 보며 “왜 우리 성우가 안 보이지”하며 낙담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휴대전화의 전원을 켠 순간. 이성우는 한통의 문자메시지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자리에 화석이 된 채로 오랫동안 서 있었다. 몇 번이고 휴대전화의 액정을 뚫어지게 바라봤지만, 문자메시지 내용은 변함이 없었다.
‘성우야,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이성우의 가족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막내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 그 바람에 막내는 아버지의 죽음도 모른 채 안타를 치고 나서 손을 들어 환호했다.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이성우가 입을 열었다.
“믿어지세요? 아버지가 눈을 감으실 때 제가 손을 들어 환호했다는 게. ‘아버지, 보시라’고. ‘아버지, 힘내시라’고…. 그런 의미였는데…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그렇게 기뻐했으니….”
그러나 이성우가 모르는 게 있다. 아들의 안타와 환호를 보며 아버지가 비로소 눈을 감았다는 것을. 막내를 향한 가엾음과 미안함을 어느 정도 덜고 먼곳으로 갈 수 있었다는 것을.
아침이 되지 않는 저녁은 없고, 그치지 않는 비는 없다. 부친을 잃은 고통과 슬픔도 영원하진 않을 것이다. 이성우가 슬기롭게 아픔을 극복하길 바란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격려와 위로가 이성우에게 전달되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