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상세 가계도
조선왕들의 상세 가계도(각 왕위명 클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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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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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계표 |
왕명:왕(王) - 성(性):이(李) 27대 518년(환기8589~9107, 서기1392~1910) |
대 |
왕명 |
년도 |
재위 |
약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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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태조(太祖) |
8589-1392 |
6 |
휘는 성계(成桂). 고려말 무신으로 왜구를 물리쳐 공을 세우고,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92년 조선왕조를 세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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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정종(定宗) |
8595-1398 |
2 |
휘는 방과(芳果). 사병을 삼군부에 편입시킴. 즉위 2년만에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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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태종(太宗) |
8597-1400 |
18 |
휘는 방원(芳遠). 태조가 조선을 세우는데 공헌하였으며, 왕자들의 왕위 다툼(왕자의 난)에서 이겨 왕위에 오름. 여러 가지 정책으로 조선왕조의 기틀을 세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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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세종(世宗) |
8615-1418 |
32 |
휘는 도. 태종의 셋째아들.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려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 해시계 등의 과학기구를 창제케함. 외치에도 힘을써 북쪽에 사군과 육진, 남쪽에 삼포를 두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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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문종(文宗) |
8647-1450 |
2 |
휘는 향(珦). 학문에 밝고 인품이 좋았으며, 세종의 뒤를 이어 유교적 이상 정치를 베풀고 문화를 발달 시켰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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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단종(端宗) |
8649-1452 |
3 |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계유사화로 수양대군에 의해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함. 200년후인 숙종때 왕위를 다시 찾아 단종이라 하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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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세조(世祖) |
8652-1455 |
13 |
휘는 유. 단종을 좇아내고 왕위에오른 수양대군. 국조보감(國朝寶鑑), 경국대전(經國大典) 등을 편찬하고 관제의 개혁으로 괄목할만한 치적을 남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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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예종(睿宗) |
8665-1468 |
1 |
휘는 광(胱). 세조의 둘째 아들. 세조때부터 시작한 경국대전을 완성 시켰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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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성종(成宗) |
8666-1469 |
25 |
휘는 혈. 학문을 좋아하고 숭유억불, 인재등용 등 조선초기의 문물 제도를 완성함. 경국대전을 편찬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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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연산군(燕山君) |
8691-1494 |
12 |
휘는 융. 폭군으로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를 죽임. 중종반정으로 폐위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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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중종(中宗) |
8703-1506 |
38 |
휘는 역. 혁신정치를 기도하였으나 훈구파의 원한으로 실패하고 1519년 기묘사화, 신사사화를 초래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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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인종(仁宗) |
8741-1544 |
1 |
장경왕후의 소생. 기묘사화로 없어진 현량과를 부활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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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명종(明宗) |
8742-1545 |
22 |
휘는 환. 중종의 둘째 아들. 12세에 즉위하여 을사사화, 정미사화, 을유사화, 을묘왜변을 격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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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선조(宣祖) |
8764-1567 |
41 |
명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16세에 즉위. 이이, 이황 등의 인재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으나 당쟁과 임진왜란으로 시련을 격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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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광해군(光海君) |
8805-1608 |
15 |
휘는 혼. 당쟁으로 임해군, 영창대군을 역모로 죽이고(계축사화),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등 패륜을 많이 저질렀으며 한편 서적편찬 등 내치에 힘쓰고 명나라와 후금에 대한 양면 정책으로 난국에 대처함. 인조반정으로 폐위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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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인조(仁祖) |
8820-1623 |
26 |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으나 이괄의 난, 병자호란, 정묘호란을 격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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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효종(孝宗) |
8846-1649 |
10 |
휘는 호. 인조의 둘째 아들. 병자호란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8년간 잡혀 갔다 돌아와 즉위후 이를 설욕하고자 국력을 양성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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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현종(顯宗) |
8856-1659 |
15 |
휘는 연. 즉위 초부터 남인과 서인의 당쟁에 의해 많은 유신들이 희생됨. 대동법을 전라도에 실시하고, 동철제 활자 10만여 글자를 주조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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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숙종(肅宗) |
8871-1674 |
46 |
남인, 서인의 당파싸움(기사사화)과 장희빈으로 인한 내환이 잦음. 대동법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확정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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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경종(景宗) |
8917-1720 |
4 |
휘는 윤. 숙종의 아들로 장희빈 소생. 신임사화 등 당쟁이 절정에 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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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영조(英祖) |
8921-1724 |
52 |
타평책을 써서 당쟁을 제거에 힘썼으며, 균역법 시행, 신무고 부활, 동국문헌비고 발간 등 부흥의 기틀을 만듬. 말년에 사도세자의 비극이 벌어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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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정조(正祖) |
8973-1776 |
24 |
휘는 성. 탕평책에 의거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서적보관 및 간행을 위한 규장각을 설치함. 임진자, 정유자 등의 새활자를 만들고 실학을 발전시키는 등 문화적 황금 시대를 이룩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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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순조(純祖) |
8997-1800 |
34 |
휘는 공. 김조순(金組淳) 등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시대. 신유사옥을 비롯한 세차레의 천주교 대탄압이 있었음.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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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헌종(憲宗) |
9031-1834 |
15 |
휘는 환(奐). 8세에 즉위하여 왕5년에 천주교를 탄압하는 기해사옥이 일어났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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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철종(哲宗) |
9046-1849 |
14 |
휘는 변. 헌종이 후사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황후의 명으로 즉위함. 왕2년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여 안동 김씨세도정치가 시작됨. 진주민란 등 민란이 많았음. 병사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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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고종(高宗) |
9060-1863 |
44 |
휘는 희(熙).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대원군과 민비의 세력다툼, 구미열강의 문호개방 압력에 시달림.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퇴위함. 임오군란이일어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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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순종(純宗) |
9104-1907 |
3 |
이름은 척(拓). 고종의 둘째 아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35년간 치욕의 일제시대를 보내게됨. 이왕(李王)으로 불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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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 |
1907-1910 |
조선 연혁표 |
1393년 | 2월 국호를 조선으로 바꿈. |
1394년 | 10월 한양천도(漢陽遷都) |
1398년 | 8월 제1차 왕자의 난 일어남, ![]() ![]() |
1398년 | (태조 7)년 9월 태조, 방과(芳果)에게 왕위를 물려줌(定宗) |
1400년 | (정종 2)년 1월, 제2차 왕자의 난 발생 |
1400년 | 11월 정종, 방원(芳遠)에게 왕위를 물려줌(太宗) |
1401년 | (태종 1)년 7월 신문고(申聞鼓)설치 |
1406년 | (태종 6)년 3월 선교양종이 사사(寺社) 242개만 남기고 나머지는 없앰. 사찰의 토지와 노비를 제한하고, 나머지는 몰수함. |
1414년 | (태종 14)년 경기좌우도를 경기도로 개편 : 전국 8도 체제가 완성됨. |
1416년 | (태종 16)년 8월 승려들에게 도첩을 지급함 : (度牒制)![]() |
1420년 | (세종 2)년 3월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함 |
1425년 | (세종 7)년 2월 처음으로 동전을 사용 |
1425년 | 4월 저화 사용을 금지하고 동전만 사용하도록 함 |
1429년 | (세종11)년 정초(鄭招),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함 |
1434년 | (세종 16)년 6월 장영실(蔣渶實), 자격루(自擊漏 : 물시계. 시간이 되면 종을 침)를 만듦. 이 해, 동북면에 6진(六鎭) 설치 |
1443년 | (세종 25)년 2월 계해조약(癸亥條約)체결 : 통신사(通信使)가 쓰시마 도주와 세견선(歲遣船) 50척으로 정함. |
1443년 | 12월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 |
1445년 | (세종 27)년 4월 정인지(鄭麟趾), 권제(權踶) 등,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10권을 편찬하여 올림. |
1446년 | (세종 28)년 9월 훈민정음 반포 |
1447년 | (세종 29)년 7월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완성. 이해 안견(安堅)이 「몽유도원도」 그림. ![]() |
1452년 | (문종 2)년 2월 김종서 등 『고려사절요』 편찬 : 연대순으로 정리한 고려 역사책. 5월 단종(端宗) 즉위. ![]() |
1455년 | (단종 3)년 윤6월 단종, 수양대군(世祖)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됨. |
1456년 | (세조 2)년 6월 ![]() |
1457년 | (세조 3)년 6월,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하여 영월에 유배, 10월 영월에서 노산군(단종)사망. |
1463년 | (세조 9)년 11월 홍문관(弘文館) 설치. |
1467년 | (세조 13)년 5월 이시애의 난(李施愛亂) 발생. |
1468년 | (세조 14)년 10월 ![]() ![]() |
1470년 | (성종 1)년 11월 『경국대전(經國大典)』 교정(校訂) 완성됨. |
1478년 | (성종 9)년 12월 서거정(徐居正), 『동문선(東文選)』을 편찬함. |
1482년 | (성종 13)년 8월 폐비 윤씨(廢妃 尹氏)에게 사약을 내림.![]() |
1498년 | (연산군 4)년 7월 무오사화(戊午士禍) 발생, 10월 김종직(金宗直)의 문집을 모아 불태움. |
1504년 | (연산군 10)년 10월 갑자사화(甲子士禍) 발생.![]() |
1506년 | (연산군 12)년 9월 중종 반정 : 박원종(朴元宗) 등, 왕을 폐하고(晋城大君)을 왕으로 옹립(中宗). 폐왕을 연산군(燕山君)에 봉함. |
1510년 | (중종 5)년 4월 삼포왜란(三浦倭亂) 발생. |
1512년 | (중종 7)년 8월 임신조약(壬申條約) 체결. |
1517년 | (중종 12)년 6월 축성사(築城司)를 비변사(備邊司)로 개칭. |
1517년 | 12월 기묘사화(己卯士禍) 발생 |
1519년 | (중종 14)년 4월 ![]() |
1522년 | (중종 17)년 12월 소격서(昭格署)를 설치 : 도교 의식에 따라 하늘에 제사지내는 기관 조광조 등이 소격서는 이단이며, 하늘에 지내는 제사는 천자만 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1518년 폐지. 이때 부활되었다가 선조대에 다시 폐지됨. |
1530년 | (중종 25)년 8월 이행(李荇),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편찬 : 조선 전기 지리지의 완성본. 백과 사전식으로 지방의 정치,경제,역사,행정,사회,민속,인물 등을 기록했고, 각 도의 지도도 수록함. |
1539년 | (중종 34)년 4월 영조문(迎詔門)을 영은문(迎恩門)으로 개칭 : 명나라 사신이 머무는 모화관(慕華館) 앞의 문 이름을 명나라가 영은문으로 바꿀 것을 요구. 1896년 사대의 상징이라 하여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움. |
1543년 | (중종 38)년. 풍기군수 ![]() |
1545년 | (인종 1)년 8월 을사사화(乙巳士禍) 발생. |
1547년 | (명종 2)년 2월 정미약조(丁未約條) 체결. |
1550년 | (명종 5)년 2월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따라 백운동 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의 편액이 하사됨 |
1555년 | (명종 10)년 5월 을묘왜변(乙卯倭變) 일어남. |
1559년 | (명종 14)년 3월 임꺽정의 난(林巨正亂) 발생.![]() |
1572년 | (선조 5)년 ![]() |
1575년 | (선조 8)년 7월 동서분당(東西分黨). |
1580년 | (선조 13)년 정철(鄭澈),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지음. |
1589년 | (선조 22)년 10월 정여립 모반 사건(鄭汝立謀反事件) 발생. |
1590년 | (선조 23)년 3월 황윤길(黃允吉), 김성일(金誠一)을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 이 무렵, 동인이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나뉨. |
1592년 | (선조 25)년 4.13일 임진왜란 발발 |
1592년 | 4.30일 선조, 한성을 떠나 피난길에 오름. |
1592년 | 5.29일 사천 해전에서 거북선을 처음으로 사용. |
1592년 | 7월 말 곽재우(郭再祐)가 경상도 의령, 현풍, 영산 등지에서 왜군 격파. |
1592년 | 8월 금산 전투에서 조헌과 영규의 의병 전산(七百義塚). |
1592년 | 10월 진주대첩(晉州大捷). |
1592년 | 6월 일본군, 진주성 공격, 논개(論介) 사망. |
1593년 | (선조 26)년 2월 행주대첩(幸州大捷) : 함경,평안도의 일본군, 한성으로 퇴각. |
1594년 | (선조 27)년 2월 훈련도감(訓練都監) 설치. |
1597년 | (선조 30)년 1월 정유재란(丁酉再亂) 발발. |
1598년 | (선조 31)년 11월 노량 해전 : 이순신 함대, 일본 수군을 대파시킴. 이순신(李舜臣) 전사. |
1605년 | (선조 38)년 4월 유정(惟政), 일본에서 포로 3000여 명을 데리고 돌아옴. |
1607년 | (선조 40)년 이 해 허균(許筠)이 『홍길동전』을 지음. |
1608년 | (선조 41)년 2월 광해군(光海君) 즉위. 이 해 경기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함. |
1610년 | (광해군 2)년 8월 허준(許浚),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완성함. |
1618년 | (광해군 10)년 1월 인목대비의 호를 삭탈하고 서궁(西宮)이라 칭함. |
1619년 | (광해군 11)년 3월 명에 보낸 원군 패배,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은 금에 항복. |
1623년 | (광해군 15)년 3월 인조 반정 발생 : 이귀(李貴)를 비롯한 서인이 광해군(光海君)을 쫓아내고 인조(仁祖)를 추대함.![]() |
1626년 |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 발발. |
1627년 | (인조 5)년 1월 정묘호란(丁卯胡亂) 일어남. |
1636년 | (인조 14)년 2월 후금이 보낸 국서를 받지 않고 거절함.![]() |
1652년 | (효종 5)년 이 해, 효종의 북벌정책(北伐政策)이 본격적으로 추진됨. |
1653년 | (효종 4)년 8월 네덜란드인 하멜(Hamel, H) 일행의 제주도 표착이 보고됨 : 1666년 탈출하여 『하멜표류기』를 씀. |
1654년 | (효종 5)년 3월 제1차 나선정벌(羅禪征伐). |
1659년 | (효종 10)년 5월 제1차 예송논쟁(禮訟論爭). |
1674년 | (현종 15)년 2월 제2차 예송논쟁(禮訟論爭). |
1680년 | (숙종 6)년 4월 경신환국(庚申換局) : 남인이 쫓겨나고 서인이 정권을 장악. |
1683년 | (숙종 9)년 4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뉨. |
1689년 | 1689(숙종 15)년 2월 기사환국(己巳換局) : 세자책봉문제로 노론 실각, 남인 집권. |
1689년 | 6월 ![]() |
1693년 | (숙종 19)년 이 해 안용복(安龍福)이 독도에서 일본인을 쫓아 내고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일본에 확인시킴. |
1694년 | (숙종 20)년 3월 갑술옥사(甲戌獄事) : 노론이 정권을 잡고 남인은 몰락함. |
1701년 | (숙종 27)년 10월 장희빈(張禧嬪), 사약을 받음. |
1712년 | (숙종 38)년 5월 백두산 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세움.![]() |
1725년 | (영조 1)년 1월 탕평책 실시![]() |
1728년 | (영조 4)년 3월 이인좌의 난(李麟佐亂) 발생. |
1741년 | (영조 17)년 9월 난전(亂廛)을 엄히 금지함. |
1750년 | (영조 26)년 7월 균역법(均役法) 실시함. |
1760년 | (영조 36)년 6월 『일성록(日省錄)』 기록 시작(-1910) : 국왕의 언행과 정사를 기록한 책. 세손인 정조가 일기를 쓰면서 시작. 정조 즉위후 정부의 공식문서로 기록됨. |
1762년 | (영조 38)년 윤5월 사도세자(思悼世子), 뒤주 속에 갇혀 죽음. |
1770년 | (영조 46)년 8월 『동국문헌비고』 완성 : 정치, 경제, 문화 등 각종 제도와 문물을 분류하여 설명한 책. |
1776년 | (영조 52)년 3월 정조(正祖)즉위.![]() |
1776년 | 7월 홍국영(洪國禜), 도승지로서 세도를 부림. |
1776년 | 9월 규장각(奎章閣) 설치. |
1783년 | (정조 7)년. 이 무렵. 박지원(朴趾源)이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지음. |
1790년 | (정조 14)년. 안정복(安鼎福),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지음 |
1791년 | (정조 15)년 2월, 신해통공(辛亥通共) : 금난전권을 폐지함.![]() |
1797년 | (정조 21)년 이긍익(李肯翊,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편찬 : 조선태조부터 숙종대까지의 야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역사책. |
1801년 | (순조 1)년 9월 황사영 백서 사건(黃嗣永 帛書 事件) 일어남. |
1805년 | (순조 5)년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勢道政治) 시작. |
1811년 | (순조 12)년 12월 평안도 농민전쟁(平安道 農民戰爭) 일어남. |
1814년 | (순조 13)년 제주도에서 민란 일어남.![]() |
1817년 | (순조 17)년 김정희, 북한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힘. |
1831년 | (순조 31)년 9월 로마 교황청이 천주교 조선 교구를 설치함. |
1840년 | (헌종 6)년 12월 왕대비, 수렴청정을 거둠.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됨. |
1846년 | (헌종 12)년 7월 ![]() |
1848년 | (헌종 14)년 이양선(異樣船)이 경상, 전라, 황해, 강원, 함경 등지에 계속 나타남.![]() |
1861년 | (철종 12)년 ![]() |
1862년 | (철종 13)년 2월 진주 민란 일어남. |
1863년 | (철종 14)년 11월 동학교주 최제우(崔濟愚) 체포됨. |
1863년 | 12월 고종(高宗)즉위 :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정권을 장악. |
1864년 | (고종 1)년 3월 동학교주 최제우(崔濟愚), 대구에서 사형당함. |
1864년 | 4월 서원, 향현사(鄕賢祠) 등에 토지와 재산을 보고하도록 명령 : 대원군의 서원 철폐 정책 시작. |
1865년 | (고종 2)년 4월 경복궁 중건(景福宮重建)을 지시. |
1866년 | (고종 3)년 1월 병인박해 시작(-3월) : 남종삼(南鐘三) 등 천주교 신자 몇천명과 프랑스인 베르뉘를 비롯한 9명의 선교사를 처형하고 천주교 서적과 판목(版木)을 불태움. |
1866년 | 3월 민치록(憫致祿)의 딸을 왕비로 정함(憫妃). |
1866년 | 7월 제너럴 셔먼호 사건(General Sherman) 발생. |
1866년 | 9월 병인양요(丙寅洋擾) 발생. |
1866년 | 7월 고종, 경복궁으로 옮김. |
1868년 | (고종 5)년 4월 남연군묘(南延君墓) 도굴 사건 발생. |
1871년 | (고종 8)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발생. |
1873년 | (고종 10)년 최익현, 대원군을 탄핵한 뒤 제주도에 유배됨. 고종, 친정(親政)을 선포. 민씨 일파의 세도 정치 시작됨. |
1875년 | (고종 12)년 운요호사건 발생. |
1876년 | (고종 13)년 1.17-19 강화에서 조일 수호 회담 열림. |
1876년 | 4. 4 일본에 수신사(修信使) 파견 : 김기수를 단장으로 76명이 일본의 관청과 공장을 비롯한 문물을 시찰. |
1879년 | (고종 16)년 12월, 지석영(池錫永)이 충주 덕산에서 처음으로 40여명에게 종두법 실시. |
1880년 | (고종 17)년 8.28 김홍집(金弘集) 청의 황준헌이 저술한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을 왕에게 바침. 이 해 최시형의 『동경대전(東經大全)』이 간행됨. |
1881년 | (고종 18)년 4.10 신사유람담(紳士遊覽團) 파견. |
1881년 | 6월 최시형 『용담유사(龍潭遺詞)』간행. |
1882년 | (고종 19)년 4.6 조.미 수호통상조약 조언. |
1882년 | 6.9 임오군란(壬午軍亂) 발생. |
1882년 | 7.17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 체결됨. |
1882년 | 8.1 민비 환궁. |
1882년 | 8월 박영효가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태극기 고안(1883.1.27, 국기로 공식인정) |
1882년 | 10월 조.중 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 조인. |
1882년 | 12.5 독일인으로 텐진 주재 독일 영사를 지낸 묄렌도르프(Mollendorff. P.G.von)를 외교 및 재정 고문으로 초빙. |
1883년 | (고종 20)년 10.1 박문국, 한성순보(漢城旬報) 발간. |
1884년 | (고종 21)년 10.7 갑신정변(甲申政變) 발발. |
1884년 | 10.24 ![]() |
1885년 | (고종 22)년 2.19 미국 선교 의사 알렌(Alen. H.N.)세브란스 병원의 전신인 광혜원(廣惠院)설립. |
1885년 | 3.1 거문도 사건(巨文島事件) 발발. |
1885년 | 8.3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Appenxeller, H.G)가 최초의 근대식 중고등 교육 기관인 배재학당 설립. |
1886년 | (고종 23)년 4.28 이화학당(梨花學堂) 설립. |
1889년 | (고종 26)년 9.14 함경도 감사 조병식(趙秉式)이 함경도에 방곡령(防穀令) 실시. |
1892년 | (고종 29)년 11.1 동학교도 삼례 집회(參禮集會)를 개최. |
1893년 | (고종 30)년 3.11 동학교도 보은 집회(報恩集會)를 개최. |
1894년 | (고종 31)년 1.10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 발발. 고부관아 점령. |
1894년 | 3.21 농민군, 고부 백산에서 봉기. |
1894년 | 4.6-7 농민군, 황토현에서 관군과 보부상의 연합부대를 물리침. |
1894년 | 6.8-9 일본측, 조선에 내정 개혁 강요. |
1894년 | 6.25 갑오개혁(甲午改革) 시작. |
1894년 | 6-7월 농민군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폐정 개혁안(廢政改革案)을 실시. |
1894년 | 9.13 농민군 2차 봉기(農民軍二次蜂起). |
1894년 | 11.28 전봉준(全琫準), 전라도 순창에서 체포됨. |
1895년 | (고종 32)년 4.1 유길준(兪吉濬), 『서유견문록(西遊見聞)』간행. |
1895년 | 8.20 을미사변(乙未事變) : 명성황후(明星皇后) 죽음. |
1895년 | 11.15 단발령(斷髮令)을 내림. |
1896년 | (고종 33)년 1월 각지에서 을미의병(乙未義兵) 봉기. |
1896년 | 2.11 아관파천(俄館播遷) 발생. |
1896년 | 4.7 독립신문(獨立新聞) 창간 : 발행인 서재필(徐載弼). |
1897년 | (고종 34)년 8.14 연호 광무(光武)로 고침. |
1897년 | 10.11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결정. |
1897년 | 12.24 손병희 동학 3대 교주가 됨. |
1898년 | (고종 35)년 2.22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죽음 |
1898년 | 3.10 독립협회, 서울 종로에서 대중정치 집회인 만민 공동회 개최 : 열강의 이권침탈 철회를 주장. |
1898년 | 4.9 배재 학당 협성회가 최초의 일간 신문인 <매일신문> 창간. |
1898년 | 5.29 서울 종현(鐘峴) 성당(현재의 명동 성당)준공. |
1898년 | 9.5 장지연, 남구억이 <황성신문>을 발행. |
1898년 | 10.29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개최 : ‘헌의 6조(獻議六條)’를 올림. |
1898년 | 11.4 정부, 독립협회의 해산과 주요 인물 검거를 명령함. |
1898년 | 12.25 정부,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 공동회(萬民共同會)를 해산. |
1899년 | (고종 36)년 12.4 <독립신문> 폐간. |
1901년 | (고종 38)년 5.28 제주도 대정군에서 이재수의 난(李在守亂) 발생. |
1901년 | 8월 국가(國歌) 재정 : 독일인 에케르트 작곡. |
1901년 | 11.16 목포 부두 노동자 동맹 파업. |
1903년 | (고종 40)년 5.25 용암포 사건(龍巖浦事件) 발생. |
1904년 | (고종 41)년 2.23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체결. |
1904년 | 9월 송병준의 일진회와 이용구의 진보회가 일진회(一進會)로 통합됨. |
1905년 | (고종 42)년 7.29 가쓰라.태프트 밀약 성립. |
1905년 | 8.12 제2차 영일동맹 |
1905년 | 9.5 포츠머드 강화 조약 |
1905년 | 11.17 을사조약(乙巳條約) 체결. |
1905년 | 11.20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 발표. |
1905년 | 11.30 시종무관장 민영환,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자결. |
1906년 | (고종 43)년 2.1 일제에 의한 통감부(統監府) 설치. |
1906년 | 7.22 이인직(李人稙), 신소설 『혈의 누』를 만세보에 연재하기 시작 : 최초의 신소설. 일본 작품을 표절했다는 의혹을 받음. |
1907년 | (고종 44)년 1.29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시작됨. |
1907년 | 4월 고종, 헤이그 밀사 파견. |
1907년 | 7.16 이완용, 송병준이 헤이그 밀사 파견을 이유로 고종에게 퇴위를 강요. |
1907년 | 7.20 순종(純宗) 즉위. |
1907년 | 7.24 한일 신협약(韓日新協約) : 정미7조약 체결 |
1907년 | 8월 전국 각지에서 항일의병봉기 : 정미의병(丁未義兵). |
1907년 | 11.29 신민회(新民會) 설립. |
1907년 | 12.6 13도 창의군(十三道倡義軍) 결성. |
1908년 | (고종 45)년 3.23 전명운, 장인환 스트븐스 저격. |
1908년 | 11.1 최남선, 최초의 월간 종합지 『소년』 창간 :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 발표. |
1908년 | 12.28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 |
1909년 | (고종 46)년 10.26 ![]() |
1910년 | (고종 47)년 4.15. 주시경(周時經) 『국어문법』간행. |
1910년 | 4월 이시영, 이동녕, 양기탁이 서간도 요령성 삼원보에 독립 운동을 위한 자치 기관인 경학사(耕學社)와 군사교육기관 신흥강습소 설치. |
1910년 | 8.29 한일 합병조약 공포됨. 총리대신 이완용이 통감 테라우치 마사타케와 한국 통치권을 일본 왕에게 양도하는 문서에 서명함. |
1910년 | 9.10 황현(黃玹) 자결함. |
1910년 | 9.1 <황성신문>, <대한민보> 폐간됨. : <대한매일신보>는 <매일신보>로 고쳐 총독부 기관지로 삼음. |
조선왕조 최고기록들 |
1] 최장세자신분 임금 | 조선 마지막 왕인 순종 임금은 2세때에 세자로 책봉되어 32년간을 세자신분으로 지냈다. |
2] 죽어서 왕이 된 인물 | 조선조에는 죽은후에 왕으로 추존된 인물이 다섯명인데 * 덕종은 세조[수양대군]의 아들로서 세조1년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즉위전에 죽었다. 인수대비의 남편이며 슬하에는 월산대군과 성종, 명숙공주 등 3명을 두었다. * 원종은 선조의 5남으로 1627년에 왕으로 추존됨. 인조 등 4남을 둠. * 진종은 영조의 아들로 사도세자와 4촌. 6세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즉위전에 죽었다. 양자인 정조가 즉위하자 진종으로 추존. * 장조는 유명한 사도세자로서 영조의 둘째아들이며 정조의 아버지. 부인은 홍봉한의 딸인 혜경궁 홍씨. 당파싸움의 희생양이 되어 아버지 영조에 의해 죽음. 1899년 장조로 추존됨. * 익종은 순조의 아들이며 헌종의 아버지. 4세에 세자로 책봉되고 19세때[순조27년]대리청정으로 참정하였으나 4년만에 죽고 뒤에 익종으로 추존됨. |
3] 가장 많은 아들을 둔 왕 | 세종대왕이 18명으로 가장많고, 다음이 성종 16명, 2대정종이 15명 순이다. 딸은 태종[이방원]이 17명이며, 성종이 12명, 중종과 선조가 11명 이었다. |
4] 왕비를 가장많이 배출한 가문 | * 청주한씨가 1위[태조비:신의왕후],[덕종비:소혜왕후],[예종비:장순왕후],[성종비:공혜왕후],[예종비:안순왕후],[인조비:인열왕후]로 가장많고 * 파평윤씨와 여흥민씨가 4명, 청송심씨와 안동김씨가 3명이다. |
5] 자식을 많이 낳은 왕비는 | 세종대왕비 소헌왕후 심씨는 8남2녀를 낳았다. 성종의 제9비 숙의홍씨도 7남3녀로 공동1위이다. |
6] 가장 짧은기간 재위한 임금 | 12대 인종이며 재임기간 9개월이었다. |
7]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임금 | 21대 영조로서 51년 7개월로서 반세기동안 왕좌를 지켰다. |
8] 가장 단명한 임금 | 단종애사의 주인공 6대 단종으로서 17세에 사약을받고 죽음 |
9] 가장 장수한 임금 | 21대 영조로서 83세까지 장수했다 |
10] 가장 많은 부인을 둔 임금 | 3대태종과 9대성종으로서 12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세종대왕은 6명이었다. |
11] 가장 길게 벼슬에 있었던 인물 | 조선말엽의 정원용 으로서 20세에 급제하여 마지막 영의정을 지낼 때까지 72년간을 관직에 있었으며 그는 지극히 검소하여 청백리에 올라있기도 하다. |
12] 호조판서 최장기간 인물은 | 영의정 정태화의 후손인 정홍순으로 무려 11년간을 호조판서로 재임한 유일무이한 인물. 그는 재정문제에 대한 당대 제일인자의 명성을 날렸다. |
13] 홍문관 대제학 최장기간 인물 | 당대의 대문장가 서거정[달성서씨]로 23년간을 재임했다. |
14] 가장 여러임금 보좌 인물 |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까지 7대의 임금을 보좌한 김세민[경주김씨]으로 70년동안 봉직하면서 7대의 임금을 보좌하는 대기록을 남겼다. |
15] 가장 장수한 인물 | 여중추부사 권황[안동]과 죽림칠현의 한사람인 홍유손으로 모두 99세까지 살았다. |
16] 가장 귀양살이 오랜 인물 | 다산 정약용으로 28세때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종교문제로 19년간 강진에 유배됨. |
17] 예조판서 최장기간 인물 | 범옹 신숙주로 무려 15년간 예조판서에 재임하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뛰어난 어문학자로서 7개국어에 능통했으며 외교문서는 거의 신숙주의 손을 거쳤다. |
18] 영의정 최장기간 인물 | 유명한 재상 황희정승으로 지속적으로 18년간을 재임하는 대기록을 남겼다. 그는 조선 제일의 청백리 관료이자 가장 대표적인 신하이다. |
19] 영의정을 가장 여러번 인물 | 최석정[전주최씨]으로 서 56세에 영의정이 된후 8번을 지냈다. 그는 소론의 영수이었다. |
20] 이조판서를 가장 여러번 인물 | 42세에 이조판서가 된 박종덕[반남박씨]으로서 무려 18번이나 이조판서에 올랐다. 관료들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관직으로서 임금의 절대적인 신임이 있어야 하는만큼 그는 공평한 인사에 최선을 다한 인물이다. |
21] 한성판윤[서울시장] 최다역임 인물 | 이가우[연안이씨]로서 34세에 급제한후 10번을 한성판윤에 올랐다. |
22] 판서[장관]직을 최다역임 인물 | 박종래로서 이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등 5조판서를 돌아가며 총 15회 지냈다. |
23] 사헌부 수장을 최다역임 인물 | 13년간 해마다 대사헌에 임명된 권상하[안동권씨]이며 송시열의 수제자이다. |
24] 책을 가장 많이 저술한 인물 | 지봉유설의 저자 이민구[전주이씨] 24세에 장원급제한 사람으로서 문장이 뛰어나고 저술을 좋아해서 무려 4000여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
25] 호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인물 | 유명한 추사체의 창시자 김정희. 그는 약 200개의 호를 지어썼다. 완당,추사,노과,등등... |
26] 벼슬 사직상소 많이 올린 인물 | 영의정이었던 정태화는 37번이나 사직상소[사직서]를 올려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
27] 최연소로 과거에 급제한 인물 | 15세의 이건창으로 1866년[고종3] 강화도 별시문과에 합격했다.[김종서는 16세에 합격] |
28] 최연소 장원급제 인물 | 17세의 박호[밀양박씨]는 1584년[선조17] 친시문과에 장원급제했다 [임진왜란때 전사] |
29] 무과출신 급제자중 최연소 인물 | 17세의 남이[의령남씨]1457년[세조3] 무과에 장원급제.[유자광의 모함으로 주살됨] |
30] 최연소로 세자에 책봉된 인물 | 영조의아들 사도세자는 2세에 세자책봉 되었으나 그만 뒤주속에 갖혀죽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사도세자는 10세에 결혼하여 최연소 결혼기록도 가지고 있다. |
31] 최연소로 영의정이 된 인물 | 세종대왕의 손자인 이준[임영대군의아들]으로서 28세때 영의정에 특서됨. |
32] 병조판서 최연소 역임 인물 | 권람의 사위인 남이가 27세에 병조판서가 됨. |
33] 대제학을 최연소 역임 인물 | 만인의 존경의 대상이었던 벼슬의꽃 홍문관 대제학에 한음 이덕형이 31세에 올랐다. |
34] 최초로 기독교 신자가 된 인물 | 평북 의주 출신인 이성하로서 고종11년에 영국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국최초의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
35] 최초로 천주교 세례교인 인물 | 정약용의 매부인 이승훈이 북경에서 그라몽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
36] 최초로 정승이 된 인물 | 조선개국 일등공신 배극렴이다. 그는 이성계보다 10살이 많았는데 개국후 처음으로 좌정승[문하 좌시중]이 되었다. |
37] 최초 한성판윤[서울시장] 인물 | 성석린이 1395년에 초대 한성판윤부사로 임명되는 기록의 보유자가 됐다. |
38] 과거급제않고 영의정 오른 인물 | 황희정승의 아들 황수신이다. 그는 조상의 음덕으로 벼슬길에 오른 대표적인 인물이다. |
39] 최초로 일본에 대해 저술된 책 | 신숙주가 일본방문을 한후 저술한 [해동제국기]이다. 일본내막을 상세하게 적은 책으로 최초의 일본안내서가 되었다. |
40] 현존하는 최초족보는 | 세종5년에 간행된 문화유씨의 영락보라고 하는데 불행이도 전하지 않으며 현존하는 최초의 족보는 1476년의 안동권씨세보로 알려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