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스볼~~~

다양한 도루의 세계

동예영 2011. 5. 26. 14:31

다양한 도루의 세계

2001년 6월 26일 피츠버그와 밀워키의 경기에서 7회 말 두번 다시 보기 어려운 진풍경이 펼쳐졌다. 1루에서 두 번에 걸쳐 세이프가 아웃으로 둔갑하는 오심에 격분한 로이드 맥클랜든 감독이 1루 베이스를 뽑아서 더그아웃에 던져 버렸다. 당연히 심판은 퇴장을 선고했고 맥클랜든 감독은 1루 베이스와 함께 더그아웃을 떠났다. 글자 그대로 1루를 훔친 것이다. 맥클랜든 감독과 달리 1루 베이스로 도루한 이들도 있다.

 

 

세상에서 훔칠 수 없는 것, 1루

1911년 8월 4일 워싱턴 세네터스는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경기에서 9회 말 주자 1, 3루의 끝내기 기회를 맞이했다. 워싱턴은 더블 스틸로 경기를 끝내려고 했지만 시카고 포수는 어디에도 송구하지 않으며 주자 2, 3루가 됐다. 투수가 다음 공을 던졌을 때 양 팀 벤치는 물론이고 관중도 아연실색했다. 2루 주자 셰퍼가 1루로 역주행한 것이다. 다시 맞이한 주자 1, 3루에서 셰퍼는 또 도루를 시도했고 이번에는 포수가 2루에 송구했다. 이에 셰퍼는 의도적으로 런다운에 걸렸고 그 틈을 타 3루 주자가 홈을 파고들었지만 태그아웃됐다.

 

1루로 가는 역주행은 셰퍼가 처음이 아니다. 1902년 해리 데이비스와 1908년 프레디 테니가 역주행 도루에 성공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20년에 3루에서 2루로, 2루에서 1루로 역주행 도루는 금지됐으며 시도됐을 때는 즉시 타임을 선언하고 주자 아웃을 선고한다. 같은 역주라도 리터치를 위해 되돌아오는 것은 상관없다.

 

세상에 훔칠 수 없는 게 딱 두 개가 있다면 그것은 사람의 마음과 1루일 것이다. 천부적인 도루 능력을 타고났다고 해도 1루에 출루하지 못한다면 휘발유 없는 페라리와 마찬가지다. <사진: 한상구>

 

 

예를 들어 외야 플라이를 1루 주자가 안타로 판단해서 2루, 3루를 돌아서 홈 플레이트를 향했다고 하자. 그런데 타구를 외야수가 잡았을 때 주자는 뛰어온 역순으로 3루, 2루를 거쳐 1루로 돌아가야 한다. 그 사이에 외야수가 송구한 공을 잡은 수비수에게 태그를 당하거나 1루에서 포스플레이가 이뤄졌을 때는 아웃이 된다.

 

 

도루를 기록했지만 도루가 아니다

도루에 성공했지만 도루로 인정받지 못할 때도 있다. 2008년 8월 6일 LG와 KIA의 경기에서 LG 이대형은 6-11으로 크게 뒤진 9회 말 1사 2루에서 3루 도루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대형의 도루는 도루로 기록되지 않았다. 기록원이 무관심 도루를 적용한 것이다. KIA 포수 김상훈이 송구하려는 시늉은 했지만 3루수 박기남이 3루로 들어갈 뜻을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관심 도루는 야구 규칙 10.08 (g)에 “주자가 단순히 수비 측의 무관심을 틈타 진루하였을 경우 도루를 기록하지 않고 야수선택으로 기록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단 주자 1, 3루에서 1루 주자가 2루로 가려고 할 때 포수가 3루 주자가 본루로 들어올 것을 의식해서 송구하지 않았을 때는 수비 행위가 없었다고 해도 적용하지 않는다.

 

“도루에서 세이프, 아웃은 심판이 판정하지만 도루 성공과 실패는 기록원이 판단한다. 무관심 도루나 도루자(盜壘刺) 등 경기 상황을 보고 판단해야 할 내용이 많기에 잠시도 한눈을 팔지 못한다. <사진: 야구라>

 

 

야구 팬이라면 한번씩은 들어 봤을 무관심 도루는 어떤 상황에서 성립할까? 윤병웅 KBO 기록위원장은 다음과 같은 4가지 관점을 기준으로 제시했다.

1. 야수의 플레이적 측면 - 1루수가 1루에 주자가 있는데도 1루에 들어가지 않고 주자가 없을 때 수비 포지션을 취하며 도루를 시도하는 데도 포수가 송구할 의지를 전혀 나타내지 않는다. 거기에 포수의 송구를 받을 야수가 베이스 커버를 하지 않을 때이다.

 

2. 경기 상황적 측면 - 점수 차이가 크게 벌어져서 수비 측이 주자들의 움직임에 전혀 관심을 나타내지 않을 때. 다만 점수 차이가 상당히 난다고 해도 경기 초, 중반에는 무관심 도루의 적용을 될 수 있으면 제한하고 종반에 적용된다.

 

3. 주자의 플레이적 측면 - 주자가 수비 측의 아무런 제지도 없을 때 뛰었거나 주자의 주루가 전력 질주가 아닐 때 무관심 도루의 적용을 고려한다.

 

4. 기록원의 판단적 측면 - 점수 차이가 크게 난 상황에서 야구 정서상 상대에게 불쾌감을 주기에 충분한 의미 없는 도루로 판단될 때다.

특히 앞서고 있는 팀의 선수가 했을 때 거의 무관심 도루로 적용된다.

 

원래 규정에 있었지만 유명무실하던 무관심 도루가 한국 프로야구에서 적용되기 시작한 것은 2002년부터다. 윤 위원장은 “무관심 도루가 일반화된 메이저리그에 한국 선수들이 진출한데다가 큰 점수 차이에서 도루가 빌미가 되어 위협구 사고도 나고 해서 제한적으로 적용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우리보다 늦은 2008년부터 시행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무관심 도루의 첫 희생자가 나온 것은 2002년 5월 19일 한화와 삼성의 경기. 삼성이 7-1로 앞선 7회 이승엽은 도루에 성공했지만 도루로 기록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2명 이상의 주자가 동시에 도루를 시도했을 때 한 명의 주자가 아웃됐을 때는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2루 주자 토끼와 1루 주자 거북이가 더블 스틸을 시도했다고 하자. 포수는 발 빠른 토끼를 포기하고 2루에 송구해 느림보 거북이를 잡아 냈다. 이때 거북이가 도루자(盜壘刺, 도루 실패)를 기록하지만 3루에 무사히 도착한 토끼는 도루로 기록될까. 윤 위원장은 “더블 스틸이나 트리플 스틸에서 어느 주자든 아웃이 되면 어느 주자에게도 도루를 주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누상의 주자는 몇 개까지 도루자(盜壘刺)를 기록할 수 있을까? 대부분 도루 실패는 아웃이니까 1개라고 자신 있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이론적으로 누상의 주자는 무한대의 도루자(盜壘刺)를 기록할 수 있다. 3아웃에 이닝이 바뀌는데 어떻게 도루자(盜壘刺)를 무한대로 기록할 수 있느냐고 고개를 갸웃할 이도 있을 터. 야구 규칙 10.08 (i)에는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정확하게 송구한 공을 야수가 놓쳤기 때문에 도루를 시도한 주자가 살았다고 기록원이 판단하였을 때는 송구를 놓친 야수에게는 실책을, 송구한 야수에게는 어시스트를 각각 기록하며 주자에게는 도루 실패를 기록한다.”

 

정상적으로 야수가 송구한 볼을 받아서 태그 플레이를 했다면 타이밍상 아웃일 때는 주자가 살았다고 해도 기록원은 도루 성공이 아닌 도루 실패를 기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타이밍상 아웃이 조금은 애매하게도 느껴진다. 윤 위원장은 “누가 봐도 완벽하게 아웃 타이밍일 때 도루자(盜壘刺)를 주기도 한다. 포수의 송구가 이미 2루에 도달했지만 주자가 아직 슬라이딩도 못할 거리를 뛰고 있을 때 베이스 커버를 들어온 야수가 실책을 저질러 살았다고 해도 도루가 아닌 도루자(盜壘刺)를 기록한다”고 밝혔다. 누상의 주자가 훔칠 수 있는 누는 2루, 3루, 홈플레이트. 이 규정만 본다면 도루자(盜壘刺)는 최대 3개다. 왜 무한대일까? 도루 실패에 관한 야구 규칙 10.08 (h)에는 “견제구에 걸린 뒤 진루하려고 했을 때(다음 베이스로 가려고 했던 어떤 움직임도 진루하려는 의도로 간주) 주자가 아웃되거나 실책이 없었더라면 아웃됐을 때는 그 주자에게 도루 실패를 기록한다”고 기재되어 있다. 즉, 견제구에 걸렸지만 다음 베이스로 가려는 움직임을 나타낸 주자가 설령 실책으로 살았다고 해도 도루자(盜壘刺)를 기록한다. 그 주자가 런다운 중 실책에 의해 다음 베이스가 아니라 원래 베이스에서 사는 것이 계속해 반복되면 도루 실패는 무한대가 된다.

 

 

필드의 아우토반, 그린 라이트(green light)

안전하고 원활한 도로교통에 목적을 두고 설치한 신호등에서 청신호는 도로에 아무 것도 없으면 가도 좋다는 의미다. 청신호가 야구에도 있다. 청신호, 그린 라이트는 주자가 벤치의 사인 없이 스스로 판단해서 뛸 수 있는 권한을 뜻하는 말이다. 이 권한을 가진 선수는 감독이 그 선수의 도루 능력을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대도’에게는 필수 사양 가운데 하나다. 도루는 베이스가 아니라 투수의 투구 동작을 훔치는 것이며 볼카운트를 살피고 변화구를 던질 타이밍을 노리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통산 1,065도루를 기록한 일본 프로야구의 ‘대도’ 후쿠모토 유타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기 중에 항상 상대 배터리의 볼 배합을 살펴서 일정한 패턴을 찾는다. 속구보다 변화구를 던질 때 뛴다면 도루 성공률은 훨씬 높아진다. 반대로 피치아웃을 할 수 있는 볼카운트에서 시도하는 도루는 시한폭탄을 안고 뛰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도루 성공률이 73% 이상이 되어야 팀에 보탬이 된다고 한다. 도루 능력이 뛰어난 이들은 도루 성공률이 높을 뿐만 아니라 뛰어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잘 알고 있다. <사진: 양기태>

 

 

주자의 판단이 아닌 벤치의 사인에 따라 도루를 시도할 경우 나쁜 타이밍에 뛰는 불상사도 종종 일어난다. 물론 벤치는 초시계로 투수의 슬라이드 스텝에 드는 시간을 재거나 다른 여러 변수들을 고려해 살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 도루를 지시하지만 예상과는 다른 게 야구다.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 하기 때문이다. 피치아웃을 하기 어려운 볼카운트라고 해도 상대 사인을 간파했다면 공을 뺄 수도 있다. 또한 주자가 투수로부터 스타트를 뺏는 데 실패할 수도 있는 법이다.

 

일반적으로 투수가 유리한 볼카운트인 투스트라이크 노볼이나 투스트라이크 원볼에서는 피치아웃을 할 수 있기에 도루 시도는 불에 날아드는 불나방과 다름없다. 반대로 노스트라이크 투볼 등에서는 주자 견제보다는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데 급급해 뛰기에 좋은 타이밍이다. 이때 타자는 주자를 위해 헛스윙을 하며 포수의 송구를 방해할 수도 있다.

 

포수의 시야를 방해하는 좌타자가 있을 때 주자는 상대 수비가 견제와 송구에 틈을 보이면 지연 도루(Delayed steal)를 시도한다. 포수가 무릎을 꿇고 받는 습관이 있거나 유격수나 2루수가 2루로 베이스 커버를 오지 않거나 할 때 아주 효과적이다. 주자 1, 3루에서는 위장 스퀴즈번트나 위장 히트앤드런 등으로 1루 주자를 안전하게 2루로 보내는 작전도 종종 나온다. 포수가 2루 송구보다 3루 주자를 견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용한 것이다.

 

홈플레이트에서 2루까지 거리는 38.795m이며 3루까지는 27.431m다. 포수가 송구하는 데 2루보다 3루가 약 11.3m가 짧다. 그런데도 야구인들은 2루 도루보다 3루 도루가 쉽다고 말한다. 이대호가 도루왕에 오르는 주장처럼 들린다. 그러나 세상사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일단 더 많은 리드를 할 수 있다. 1루와 달리 2루는 얼음땡 놀이를 즐기는 야수가 없으며 투수가 견제할 때 몸을 180도나 틀어야 한다. 90도로 충분한 1루에 비해 귀루할 때 시간적 여유가 있다. 투수가 투구할 때 홈플레이트를 바라보기에 스타트도 더 빨리 끊을 수 있다. 그런데도 3루 도루가 드문 것은 위험성 때문이다. 단타로 홈을 밟는 것은 3루나 2루나 마찬가지다. 반면 3루 도루 실패는 득점 기회 자체를 잃어버린다. 득점권을 만드는 2루 도루와는 다른 것이다.

 

주자가 런다운에 걸린다는 것은 대개 주루 실수다. 그러나 때로는 작전에 의해 고의적으로 협살에 걸린다. 그 사이에 3루 주자가 홈으로 파고든다. <사진: 양기태>

 

 

야구 기술이 발전하면서 도루 작전도 더 정교해지고 있다. 2007년 8월 16일 SK와 삼성의 경기 7회 말 1사 만루에서 김강민은 투수 권오준이 2루에 견제구를 던지는 틈을 이용해 홈스틸에 성공했다. 얼핏 보면 김강민의 재치로 만든 홈스틸로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사전에 약속된 플레이였다. 2루 주자가 리드를 많이 해서 투수가 견제할 때 3루 주자가 홈을 노리는 훈련을 반복한 결과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2년 뒤인 2009년 8월 28일에도 삼성은 SK의 이 같은 플레이의 제물이 됐다는 점이다.

 

SK에 당한 삼성은 한화를 상대로 분풀이했다. 2009년 5월 27일 삼성은 고의 런다운을 통해 결승점을 올렸다. 2사 1, 3루에서 1루 주자 김창희가 한화 투수 토마스의 견제구에 고의로 협살에 걸린 사이 3루 주자 이영욱이 홈을 파고든 것이다. 야구는 작은 틈도 놓치지 않고 물고 늘어진다. 인정사정 봐주는 세계가 아니다. 공격이든 수비든.

 

 

관련글 : 도루<훔치는 자들의 세계>

 

손윤
야구전문블로그 <야구라>의 일원. 네이트 등에 야구 글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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