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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트의 세계

동예영 2011. 5. 26.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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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트의 세계

레지 잭슨. 1967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21시즌을 뛰며 통산 563홈런을 기록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대타자다. 잭슨 하면 누구나 양키스 시절인 1977년 월드시리즈 6차전에서 월드시리즈 사상 최초로 3연타석 홈런을 친 것을 떠올릴 터. 그 3연타석 홈런에 버금가는 명장면으로 손꼽히는 것이 1984년 9월 21일 8회 말 4번째 타석이다. 박경완처럼 4연타석 홈런이라도 친 것일까?

 

4-4로 맞선 8회 말 에인절스는 선두 타자 브라이언 다우닝이 볼넷을 얻자 발 빠른 케리 페티스를 대주자로 기용했다. 타석에는 이날 삼진 2개를 비롯해 3타수 무안타에 그친 레지 잭슨. 희생번트를 댄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장면이다. 하지만 잭슨은 1973년 이후 단 한 개의 희생번트도 댄 적이 없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텍사스 내야진은 번트가 아닌 강공에 대비한 수비 시프트를 취했다.

 

그러나 레지 잭슨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희생번트를 대며 1루 주자를 안전하게 2루로 보냈다. 그것도 정확하게 투수와 2루수 사이로. 이어서 후속 타자의 좌전 안타로 에인절스는 결승점을 올리며 지구 수위인 캔자스시티와 0.5경기 차이를 유지했다. 나흘 전에 역대 13번째로 500홈런을 친 타자가 12년 만에 희생번트를 댈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최근 국내 프로야구에서 스몰볼의 상징인 번트는 갑론을박의 대상이 되고 있다. 1아웃을 담보로 한 소극적인 공격이라는 시각과 안전하게 주자를 득점권에 보내는 적극적인 공격이라는 견해가 평행선을 그리고 있다.

 

감독 야구가 주류인 국내에서는 번트가 중요한 공격 작전으로 활용되고 있다. 반면 메이저리그에서는 한 경기에 한 개(2010년 메이저리그 경기당 희생번트 수는 0.3개)도 보기 어려울 정도로 사양 작전이 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빈도는 줄어들었다고 해도 여전히 마이너리그를 비롯한 초·중·고·대학에서 하는 번트 훈련은 한국 못지않다. 박빙의 경기에서 아주 효과적인 무기가 번트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번트의 세계

번트는 무사 1루 또는 1, 2루에서 공격 측이 누상의 주자를 안전하게 진루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작전이다. 반면 수비 측은 어떻게 하면 누상의 주자를 진루시키지 않을 것이냐가 지상 과제다. 그래서 희생번트가 확실할 때는 1, 3루수가 극단적으로 홈플레이트 쪽으로 전진하고 2루수는 1루를, 유격수는 3루 또는 2루 베이스를 커버하며 타자를 압박한다. 또한 피치아웃이나 견제구 등으로 주자를 베이스에 묶어 두거나 아웃시키려 한다. 이에 대해 타자는 페이크번트슬래시 등을 하며 상대 수비의 허점을 파고든다. 야구인들이 “번트가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까다로운 타격 기술”이라고 입을 모으는 이유다. 게다가 번트라고 해도 다 같은 번트가 아니다. 번트는 크게 5가지로 분류된다.

 

“프로야구 선수가 희생번트 하나 제대로 못 대느냐?!”는 말을 쉽게 하곤 한다. 그러나 번트를 성공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번트 수비도 발전했으며 원하는 곳에 적절한 빠르기로 번트 타구를 보내는 것은 아주 까다로운 타격 기술이기 때문이다. <출처: Ed Schipul at Wikipedia.org>

 

 

1. 희생번트(Sacrifice bunt) - 주자를 다음 누로 안전하게 보내기 위해 타자주자가 아웃되는 것을 전제로 한 작전이다. 일반적으로 초반보다는 1점이 필요한 경기 중, 후반에 나온다. 1루 주자를 2루로 보낼 때는 1루 쪽으로 대고 2루 주자를 3루로 보낼 때는 3루 쪽으로 타구를 보낸다. 번트 시프트를 비롯해 수비 능력이 향상되면서 희생번트를 성공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2. 스퀴즈플레이(Squeeze play) - 3루 주자를 홈플레이트로 불러들이기 위한 번트 작전이다. 크게 자살 스퀴즈(Suicide bunt)와 안전 스퀴즈(Safety bunt)로 나뉜다. 자살 스퀴즈는 투수가 투구에 들어갔을 때 3루 주자가 무조건 홈으로 뛰고 타자는 번트를 대는 것이다. 당연히 타자가 번트를 대지 못하거나 작전이 간파당해 피치아웃 등이 나오면 3루 주자는 그물에 잡힌 물고기 신세가 된다. 반면 안전 스퀴즈에서 3루 주자는 타자가 번트를 댄 타구가 투수 정면 등이 아닐 때만 홈플레이트를 향해 돌진한다. 타자는 스트라이크만 번트를 대며 3루 주자가 득점을 올릴 수 있는 곳으로 번트 타구를 보낸다. 3루수가 번트 타구를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주자의 스피드, 수비 움직임 등에 따라 1루 쪽으로 댈 때도 있다.

 

3. 푸시번트(Push bunt) - 의도적으로 강한 번트 타구를 보내는 것. 우타자는 좌투수를 상대로 2루수 쪽으로, 좌타자는 우투수를 상대로 유격수 쪽으로 대는 것이 일반적이다. 누상의 주자를 다음 베이스로 보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때로는 안타를 만들어 1루로 출루하기 위한 목적으로 구사한다.

 

4. 드래그번트(Drag bunt) - 주자의 진루가 아닌 안타를 만들기 위한 번트다. 가능한 배트의 끝 부분에 공을 맞혀서 번트 타구가 멀리 굴러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요령. 또한 실패하더라도 파울이 될 수 있도록 1·3루 선상으로 타구를 보낸다. 드래그번트의 가장 큰 목적은 성공 여부가 아닌 상대 내야수를 심리적으로 흔드는 데 있다. 드래그번트를 시도하는 타자가 나오면 수비수, 특히 3루수는 전진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3-유 공간이 넓어진 상황에서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이다.

 

5. 페이크번트슬래시(Fake bunt slash) - 번트를 댈 것처럼 자세를 취하다가 배트를 정상 타격 위치로 가져와서 치는 것을 말한다. 상대 수비가 번트 시프트, 즉 1, 3루수가 홈플레이트로 전진하고 2루수가 1루 베이스 커버를 가도록 해서 안타가 될 공간을 더 넓히는 효과가 있다. 또한 투수가 번트를 댈 것으로 생각해서 직구 등 치기 쉬운 공을 던지는 것을 역이용하는 작전이다. 번트 자세에서 타격 자세로 돌아가서 치기 때문에 장타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선구안이 나쁜 타자에게는 유효한 타격 기술 가운데 하나다. 김영진(전 삼성)과 추승우(한화) 등은 평소에도 이 타격 자세를 취한 대표적인 선수다.

 

누상에 주자를 둔 상황에서 주자의 진루에 목적을 둔 희생번트와 타자가 출루하기 위해 시도하는 기습번트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민감한 문제다. 타자의 타율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희생번트는 타수로 기록되지 않지만 기습번트는 타수로 취급된다. 예를 들어 3타수 1안타를 기록하고 있는 선수가 희생번트를 대면 타율은 3할3푼3리(3타수 1안타)을 유지한다. 반면 기습번트로 인정된 가운데 아웃당하면 타율은 2할5푼(4타수 1안타)으로 떨어진다. 희생번트 여부를 판단하는 이는 공식기록원인데 그 기준은 무엇일까?

 

“과거에는 타자의 자세, 즉 평소 타격 자세에서 갑자기 번트를 댄 것은 희생번트가 아니라 기습 번트로 판단했다. 그러나 야구 기술이 발달하며 타자가 미리 번트 자세를 취하면 수비 측이 번트 시프트로 압박하기 때문에 타자의 자세만으로 판단하기 어렵게 됐다. 그래서 2003년 큰 변화가 있었다. 타자의 자세가 아닌 상황을 보는 것으로. 번트에 대비한 수비수 의 움직임이 있을 때는 기습적인 번트라고 해도 희생번트로 판단하고 있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장의 설명이다.

 

번트 수비가 발전하면서 타자의 자세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단순히 타자의 자세만을 가지고 희생번트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물론 벤치의 의도를 알 수 있다면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그래서 타자의 번트 자세가 아닌 상황을 보고 판단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작전과 플레이의 진보가 기록에도 반영된 것이다. 2002년 536개에 불과하던 리그 희생번트 수가 2003년에는 755개로 증가했다. 야구 규칙은 변하지 않지만 플레이에 대한 관점이나 해석이 계속 바뀌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통계로 본 희생번트 무용론

누상에 주자를 둔 상황에서 희생번트 작전은 득점을 올리기 위한 적극적인 공격일까? 아니면 1점을 얻기 위한 소극적인 공격일까? 톰 탱고와 미첼 리트먼, 앤드루 돌핀은 세이버매트리션으로 널리 알려진 이들로 세이버매트릭스에 입각한 [The Book]의 공저자이다.

 

투 스트라이크 이후 번트가 파울이 됐을 때는 볼 데드가 되며 스트라이크 아웃으로 기록된다. 이 규정은 타자가 번트로 손쉽게 투수가 던진 볼을 쳐 내는 것을 막기 위한 규칙이다. 흔히 ‘스리번트’라고 하지만 이는 일본식 야구 용어이며 ‘bunt with two strikes’가 정확한 표현이다. <출처: Chrisjnelson at wikipedia.org>

 

 

이 책에서 2000년부터 2004년까지 누상의 주자 유무와 아웃카운트에 따른 득점 기대치를 조사했다. 투수가 타석에 들어선 것은 제외했다. 무사 1루에서 득점 기대치는 0.906점이었지만 1사 2루에서는 0.7점으로 크게 떨어졌다. 이 말은 주자를 2루로 보내는 희생번트가 오히려 득점 기대치를 0.2점 이상 떨어뜨리는 손해 보는 행위라는 의미다. 이것은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양대 리그를 조사했을 때도 같았다. 이 기간에는 득점 기대치가 무사 1루는 0.953점이며 1사 2루는 0.725점이었다.

 

무사에 주자가 출루하면 번트는 한국 야구의 정석이라고 해도 틀림없다. 그러나 이 정석이 실제로는 야구인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희생번트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메이저리그 양대 리그에서 2000년부터 2005년까지 무사 1루는 모두 5만 426차례 있었다. 이 가운데 번트가 시도된 것(투수 제외)은 약 10.8%인 5,447회였다. 5,447회 가운데 번트를 댄 것(번트에 실패해 주자가 아웃된 것을 포함)은 3,835회이고 남은 1,612회는 번트 자체에 실패하며 강공을 선택했다. 결과적으로 강공을 선택한 것을 포함해 번트 사인이 나왔을 때 1사 2루가 된 것은 48.1%밖에 안 됐다.

 

번트를 댔을 때 상대 수비진의 실책으로 무사 1, 2루가 되는 예도 적지 않다. 실제로 15.6%가 나왔다고 한다. 이것까지 포함하면 무사 1루에서 번트를 댔을 때 득점 기대치는 0.831로 상승한다. 그렇다고 해도 무사 1루에서 강공을 펼쳤을 때의 득점 기대치보다도 낮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통계에 기반을 둔 이런 주장에 대해 희생번트를 지지하는 야구인들은 “타석에 선 타자와 이닝에 따라서 가치가 다르다”고 지적한다. 사실일까? [The Book]에서는 어느 타자가 한 번 타석에 들어섰을 때의 득점 공헌도를 나타내는 wOBA(weighted on-base average)라는 지표를 활용해 타자의 능력을 구별했다. 그 결과 중심 타자가 아닌 타자가 무사 1루에서 강공을 펼쳤을 때 득점 기대치는 0.875점이었다. 결국 타자의 능력과 관계없이 무사 1루에서는 번트보다 강공의 득점 기대치가 더 높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wOBA={(0.72×고의사구를 뺀 볼넷)+(0.75×몸맞은볼)+(0.90×단타)+(0.92×실책 출루)+(1.24×2루타)+(1.56×3루타)+(1.95×홈런)}÷(타석-고의사구)

여기까지 보면 희생번트는 안정된 득점 방정식이 아니라 득점 확률을 떨어뜨리는 손해 보는 장사다. 왜 이 바보 같은 작전을 상당수 감독이 애용할까? 그 이유는 아직 검증하지 않은 이닝에 있다. 같은 1점이라고 해도 경기 초반과 종반에 따라 그 가치가 다를 수밖에 없다. 원정팀이 1회 초에 선취점을 올렸을 때 승리 확률은 5할4푼5리이며 홈팀이 1회 말 선취점을 얻었을 때는 5할9푼9리다. 또한 홈팀이 1점 앞선 상황에서 9회를 맞이했을 때 승리 확률은 8할2푼5리에 이른다.

 

‘The Book’에서는 시간에 따라 시스템 상태의 변화를 나타내는 마르코프 체인을 이용한 상황별 득점 확률을 통해 경기 상황에 따른 희생번트의 가치를 나타내고 있다. 상대 팀이 1경기당 5실점 한다고 가정했을 때 무사 1루에서 1점을 얻을 확률은 17.9%이며 2점은 13.2%, 3점은 6.9%가 된다. 1사 2루에서는 1점을 얻을 확률이 23.7%, 2점은 9.9%, 3점은 4.6%이다. 또한 무사 1, 2루에서 1점을 얻을 확률은 22.0%, 2점은 16.2%, 3점은 13.1%이고 1사 2, 3루에서는 1점이 28.5%, 2점과 3점은 각각 22.4%와 9.9%다.

 

결국 1점만 얻기 위해서는 희생번트가 효과적인 작전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1점이 경기의 승패를 가르는 종반에 해당하는 말이다. 경기 초반 희생번트는 대량 득점을 올릴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특히 고교야구에서 무사든 1사든 주자만 나가면 조건반사적으로 희생번트 사인이 나오는 것은 작전을 가장한 책임 회피일 뿐이다. 번트보다는 강공을 선택하는 김민호 부산고 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수들이 게임을 풀어갈 줄 알아야 한다. 연습할 때도 ‘무사 2루’와 같이 상황에 맞는 타격을 하도록 유도한다. 사실 선수들이 번트 연습보다 치는 연습을 더 많이 하지 않는가. 그리고 번트보다 치는 걸 더 좋아하고. 그렇게 치는 연습을 많이 했으면 경기에서도 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습 때는 치고 실전에선 번트를 대면 이길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실력 향상(선수의)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손윤
야구전문블로그 <야구라>의 일원. 네이트 등에 야구 글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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